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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팀/설예리

[정신질환] F64.0을 받다.


F64.0을 받다.







왜 이 글을 썼는가.


처음 이 주제를 받고 적잖이 곤혹스러웠다.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정신질환이 없고, 실제로 의료적 진단을 받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받은 것이라고는 F64.0(성주체성 장애)인데, 이마저도 얼마 전 뉴스에 따르면 곧 없어지지 않을까. 트랜스젠더와 정신질환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있다. 아무래도 기본적으로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상적 모습과 어긋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트랜스젠더가 많을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정신질환에 취약할 확률도 높지 않을까 생각한 정도


그래도 어쨌거나 글은 써야 하니 유일하게 의료적 진단을 받은 F64.0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현실적으로 의료적 트랜지션을 받기 위해서는 이 코드가 꼭 필요하기에 나뿐만 아니라 다른 트랜스젠더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이 코드를 받기 위해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쓰려고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F64.0은 사회에서 나를 여자로 인정한다는 공인이라 내 심적인 안정에 도움을 주었다.)




준비


우선  64.0을 받을 확률이 높은 병원을 찾았다. 종종 64.0이 아닌, 64.9 등의 코드를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몇 개의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추천 정신과 및 후기들을 찾아보았고 김 모 정신과가 제일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를 보았고, 동시에 다른 트친에게 연 모 정신과도 추천받았다.


두 번째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비용이었다. 이 코드를 받기 위한 검사는 풀배터리 검사의 요소를 포함하기 때문에 최소 20만원 이상의 비용이 소모된다. 알아본 두 곳에 전화해본바, 김 모 병원은 20만원 중반대였고 연 모 병원은 40만원으로 유추되었기에 전자의 병원을 선택하였다. (참고로 나는 서울에 거주중이기에, 서울 기준으로 알아보았다.)

갈 곳이 정해졌고, 예약을 진행했다. 김 모 병원은 예약이 상당히 많이 밀려서인지 전화한 날짜로부터 한 달 뒤로 예약 날짜를 잡아야 했다. 예약비로 약 20-30%의 비용을 입금해 예약을 확정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나는 어떻게 하면 의사들이 원하는 대답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서 답을 준비했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병원의 절차는 크게 2파트로 나뉘는데, 우선 의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설명한 다음, 간단한 설문지를 작성하고 얼마 뒤( 30분정도?) 심리 상담사에게 본격적인 상담을 받는다.

그림을 그리고 이게 무슨 의미인지 묻거나, 상식을 물어보거나, 난해한 그림을 보여주고는 무엇으로 보이는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따위를 묻는다.


검사 중에는 여러 문항을 던져서 답안을 작성하는(400개정도) 절차가 있는데 여기서 나에게 다른 병증이 있는지 체크했다.

내 결과지에는 내가 망상이나, 우울, 혼란 등으로 다른 성별로 착각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적혀있는데 이건 다른 정신질환이 발견되면 F64.0을 받을 확률이 낮아진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준비한 대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트랜스젠더 여성이란 무엇일까. 우선 내 어린 시절에 왜 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지어내야 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거짓이라면 티가 날 것이다. 나한테는 어렸을 때 소꿉놀이 세트를 사달라고 부모에게 졸랐던 기억이 있고, 그게 좌절되자 실망했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는 실제로 남자애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여자애들과 많이 어울렸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부터는 여성이라는 집단에 속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남자 집단에 속할 수도 없었다


분명 남자와 여자 집단 내부의 룰은 다르지만, 그것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 집단의 인정을 받아야 하기 떄문에 나는 계속 겉돌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어릴 때의 세세한 이야기를 다 하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에 너무 자세히 고민하지는 않았다.

다음 관건은 언제 내가 트랜스여성임을 신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어떻게 트랜스여성이라는 존재를 알았는지,


내가 거기에 속한다는 것을 언제 느꼈는지. 나는 20대 중반에 하리수 씨를 알게 되어서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는 개념을 알았다고 이야기했다. (진짜 감사합니다.) 난 스스로의 트랜스젠더 여성 정체성을 늦게 확정한 편이기 때문에,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는 개념을 안 뒤에 왜 정체성을 곧바로 확정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준비해야 했다. 공포가 제일 컸다. 수술 때문에 죽을 수 있을 거라는 공포, 돈도 많이 들 것 같고, 진짜 아플 것 같고, 수술 뒤에 정상적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고. 내가 트랜스젠더 여성임을 인정한 순간, 트랜지션이라든가 나의 사고, 이런 것들이 변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겪게 될 고통들이 무서워서 일부러 눈을 돌렸다. 그러나 최근 약 2년 간 퀴어 친구들과 교류를 시작하며 더 많은 정보를 얻었다


무서워하기만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고, 알면 알수록 더 숨기기가 어려워져서 결국 정체화를 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정체화하고 나니 마음이 급해진 거고, 가능한 빨리 수술을 받고 싶다는 점을 적극 어필했다. 내 생각에 날 진단한 상담사에게 가장 큰 인상을 준 것은 내 몸이 남자로 인지되기 때문에 여자들에게는 무서움을 줄 거고 남자들에게는 여자로 인정되지 않아서, 내 자신이 떳떳하지 못하다라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뒤에 상담사가 만약 이 코드를 받으면 수술 빨리 받으시겠네요라고 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검사할 때 물어본 것 중 하나는 내가 어떤 성별을 좋아하는지였다. 여기서 동성을 좋아한다고 하면 F64.0을 받을 확률이 

높아 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상담사가 동성애 개념을 알고 있긴 했지만.. (여기서 내 대답을 굳이 밝히지 않는다)

 



끝내며


상담사든 의사든 머릿속에 그리는 트랜스젠더 여성의 표준이 분명히 존재하고, 거기에 맞게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거짓말에 쉽게 속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면서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약간 표현을 다르게 한다거나 과장하는 등의 기교는 쓸 수 있을지언정. 나는 진심으로, 이러한 정신과 진단 없이 그냥 의료 시술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 글이 일종의 표준 답안으로 여겨지지 않기를 바란다.


F64.0을 받았다고 해도 앞으로 나에게 할 일이 너무나 많고, 그것은 이 글을 보는 다른 트랜스젠더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모쪼록 다들 힘내서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를 바란다.





_ 설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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