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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마라 부치’, 과연 ‘하지마라 부치’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가

하지마라 부치, 과연 하지마라 부치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가

부제: 디스포리아는 누구의 전유물도 아니다.[각주:1]

덴타타


영어권 레즈비언 커뮤니티에 [각주:2]불대거’, ‘[각주:3]불다이크’, ‘[각주:4]소프트 부치와 같은 말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한국 레즈비언 커뮤니티 내에서도 [각주:5]하지마라 부치’, ‘[각주:6]어허 부치’, ‘[각주:7]가부장 부치등 특정 성질을 가진 부치를 이르는 갖가지 언어가 생겨나고 있다. 이중 하지마라 부치는 성관계 시 옷을 벗지 않는 부치를 이르는 말로, 레즈비언 커뮤니티 내에서 종종 희화화되며 회자되곤 한다. 그러나 최근에 하지마라 부치에게 옷 벗기를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필자는 이에 동의하는 바로서 그 이유를 간략하게나마 적어보고자 한다.

 

먼저, ‘하지마라 부치라는 조어 자체의 문제부터 살펴보자. ‘하지마라 부치워딩의 하지마라는 섹스파트너의 탈의 권유를 거부하는 부치 당사자의 멘트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부치의 이러한 거절은 정말 희화화되어도 마땅한 것인가?

90년대-00년대 출생자들은 제도권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을 때 통상적으로 싫어요, 안 돼요, 하지마세요, 이 세 가지를 유념하라고 배웠을 것이다. (물론 이는 가해자중심적인 교육으로, 지금은 어느 정도 개선되었으리라 믿는다.) ‘하지마라 부치의 하지 말라는 단어도 어찌 보면 저런 맥락에서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보통 부치가 이성애 사회 내의 다수자인 남성을 연상하게 만들고, 부치-펨 역할 수행에서 능동성을 표방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레즈비언 사회 내의 강자로 가정한다. (‘하지마라는 말 자체의 어조는 명령형으로, 강경한 느낌을 주기에 권력 관계 상 화자가 우위에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초래한다.) 이 때문에 희화화의 당위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종종 생긴다. 그러나 레즈비언 커뮤니티 내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인기 레즈비언 데이트 어플리케이션에 접속해보면, 자기소개에 [각주:8]티부 사절이라고 적힌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한때는 여자 같은 여자만 만나고 싶다며 어느 펨이 부치는 가입 불가한 사이트를 개설한 적도 있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느껴 봤다면 부치도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치의 하지마라또한 성폭력을 거부하는 태도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납득하기 어렵다면 이 사례를 이성섹스에 한 번 대입해보자. 만일 어떤 남성이 오늘 섹파는 완전 하지마녀였다. 벗어달라고 애원했는데도 어떻게 된 게 티셔츠 한 장 안 벗더라. 끝까지 손으로만 해주는데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는 글을 올린다면 적잖은 페미니스트들이 분노할 것이다. 먼저는 성폭력에 저항하는 멘트와 를 붙여 벗기를 거부하는 여성을 희화화하고 해당 상황을 가벼이 여겼다는 데에 분노할 수 있겠다. 둘째로는 벗어달라고 애원한 것 또한 강요이며, 그 강요 또한 성폭력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하지마라 부치의 경우엔 이러한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것인가? 혹자는 여성 간에는 젠더권력이 작용하지 않으니 이성섹스와 비교해선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젠더권력이 없다고 해서 성폭력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동성강간 또한 성립될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옷을 벗지 않는 부치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마라 부치가 옷을 벗지 않음으로써 둘 사이의 상호성이 깨졌고, 평등한 섹스는 요원해졌으니 그 관계는 억압적인 것이라 할지도 모른다. 위 의견에 반박하기 전에 먼저, 무엇 때문에 이성 간 섹스보다 부치-펨 간의 섹스에 이러한 무결함이 요구되며, 어째서 옷을 벗지 않는 행위가 불평등으로 이어지는지 설명해야겠다.

70년대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레즈비어니즘을 가부장제와 남성권력을 타파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여겼다. 젠더권력의 원인을 이성결혼제도와 연관 짓고, 해당 제도가 붕괴되면 남성들 또한 힘을 잃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 간의 연애나 가정 꾸리기가 남성사회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대안으로 작용하게 되고, 이때 여성에게 끌림을 느끼지 않지만 정치적인 수단으로서 동성과 교제하는 정치적 레즈비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풍조를 이어 받은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간의 섹스야말로 가장 평등한 섹스라 주장했다. 그들은 여성 간의 페미니즘적 섹스는 늘 일방적인 섹스가 아닌 함께 느끼는 섹스일 것이라 생각했다.[각주:9] 그런 그들에게 하지마라 부치’(영어권에서는 스톤 부치라고 불렀다.)는 오점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스톤 부치들의 섹스 방식에 대해 반()페미니즘 적이라며 깎아내렸다. ‘스톤 부치들이 옷을 벗지 않고 섹스하는 이유는 상대방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기 위한 행위이며, 이는 이성애자 남성들의 폭력적인 섹스를 답습하는 것이라고 공격했다.

 

아마 한국의 레즈비언 커뮤니티 내에도 단순한 거부감이나 불편함 때문만이 아닌 위와 같은 이유로 하지마라 부치를 희화화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허나 필자는, 성관계 시 하지마라 부치의 파트너가 겪는 개인적인 불쾌감까지 추측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상호성과 평등함을 침해하므로 싫어해도 괜찮다는 논리의 오류 정도는 짚을 수 있을 것 같다.

상호성을 문제 삼는다면 사실 삽입을 당하기만 하는, 혹은 상대에게 오르가즘을 느끼게 해주지 않는 온텍’(only take)들 또한 지적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온텍들은 적어도 한국 레즈비언 사회 내에선 하지마라 부치만큼 멸시 당하지 않는다. 상호성은 둘 다 만족시키지 못하니 둘의 차이는 삽입 당함과 삽입 당하지 않음, 탈의와 비()탈의에 있는데, 그렇다면 어째서 후자만이 그렇게까지 공격 받았는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상대방의 체온을 느끼고 싶은데 옷을 안 벗으면 못 느끼니까.’, ‘나도 기브(give)를 하고 싶은데 못하게 하니까 불공평하다는 느낌이 든다.’와 같은 개인적인 사유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들이 하지마라 부치를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들까지 그들을 희화화하고 비난하는 현상의 근거가 되어주진 못한다. 통상적으로 어떤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는 암묵적인 통념이 일조한다. 그렇다면 레즈비언 사회 내에는 섹스에 참가하고 있는 여성이라면 삽입 당함이나 성기, 성감대로 인한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통념이 자리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지만 이는 매우 유성애중심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다. 몇몇 무성애자들은 섹스에 별 흥미를 못 느끼지만 파트너를 만족시키기 위해 섹스를 하고, 파트너가 만족하는 데에서 자신도 만족을 얻는다고 증언한다. 말하자면 사람 간의 성행위가 반드시 모든 참가자들의 성적 만족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존재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누군가는 다른 방면에서 기쁨을 얻을 수도 있다. 옷을 벗지 않는 것 또한 그렇다. 사실 임신의 수단이 아닌 이상 반드시 탈의가 전제되지 않아도 되는데, ‘섹스를 하려면 탈의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회적인 통념 때문에 하지마라 부치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등한 섹스에 대해 재()정의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70-80년대 서구 페미니스트들은 함께 느끼는 것을 강조했지만, 필자는 성적 감도를 떠나 함께 만족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누군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상대방의 맨몸을 느끼길 원하므로 하지마라 부치는 절대 상대에게 완전한 만족감을 줄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지금 다수의 성적 취향을 기준으로 하여 하지마라 부치를 평가하는 게 아니라 하지마라 부치를 희화화하는 풍조에 대해 비판하는 것임을 알아줬으면 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해보자면 하지마라 부치가 젠더 디스포리아(젠더위화감/성별불쾌감)를 갖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젠더 디스포리아는 보통 트랜스젠더퀴어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지만 게일 루빈은 부치가 젠더 위화감을 느끼는 여성들을 위한 생득적인 레즈비언의 범주라고 주장한다. 여기서의 젠더위화감은 신체적인 것보다는 젠더표현에 해당하는 의미일 테지만 신체적인 디스포리아가 있는 부치를 포함했을 가능성도 있다. 드랙킹으로 활동했던 주디스 잭 핼버스탬은 자신의 저서[각주:10]에서 스톤 부치의 비()삽입성, 혹은 불가촉성이 디스포리아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각주:11] 그는 이를 트랜스젠더 부치’(MTF레즈비언의 이야기가 아니라 FTM시술을 한 부치를 이르는 것이다.)와 연관 지어 설명한다. ‘스톤 부치중에서도 FTM처럼 호르몬 시술을 받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이 전부 자신을 남성으로 정체화하진 않는다는 것이다.[각주:12] 꾸준히 여성의 범주에 속하길 원하면서도 단지 신체 디스포리아를 없애기 위해 의료적 조치를 취하는 부치들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혹자는 그렇다면 그는 그냥 FTM트랜스섹슈얼이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젠더퀴어의 등장으로 지정성별, 혹은 겉보기성별(패싱되는 모습)과 젠더의 상관관계가 희미해진 상태에서 그러한 논의는 무의미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이는 하지마라 부치의 비()탈의 원인이 신체 디스포리아 때문일 수 있다는 가설의 근거를 위해 가져온 사례이지, 절대적이지 않음을 밝혀둔다. ‘하지마라 부치들 디스포리아 있대라든가 하지마라 부치들 호르몬 시술한다며라는 식으로 곡해되거나 와전되지 않았으면 한다. 설사 신체 디스포리아가 있다 해도 반드시 의료적 조치가 수반되는 것은 아니다. 디스포리아를 느끼는 것 또한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마지막으로 예상되는 몇 가지 부정적인 반응들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는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반발이 있을 수 있겠다. ‘젠더 디스포리아가 있는 부치는 젠더퀴어와 마찬가지 아닌가, 레즈비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여성인 사람이나 여성의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등 여러 정체성이 발굴되면서 레즈비언의 의미가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에서 걸플럭스, 데미걸에게까지 끌림을 느끼는 여성을 포함하도록 그 외연이 확대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레즈비언의 끌림 상대로 젠더퀴어가 제시돼있는 셈인데, ‘하지마라 부치가 젠더퀴어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해서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밀어내는 게 유의미한 일일까? 백 보 물러나서 젠더퀴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부제에 적었듯이 젠더 디스포리아는 트랜스젠더퀴어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스젠더 또한 젠더표현, 복장, 언어, 신체 등에 대해 디스포리아를 느낄 수 있다. (2014, Butch wonder에 이미 디스포리아는 트랜스만의 것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이 기고된 바 있다.) 우리가 자신의 얼굴에 불만족스러움을 느껴 수술하는 것과 자신의 성기나 신체 외형에 위화감을 느껴 의료적 조치를 하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수술에 따르는 사회적인 차별은 분명 다르지만 어쩌면 신체 디스포리아는 반드시 젠더에 종속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실제로 논바이너리 젠더퀴어임에도 바이너리적인 외형을 원해 FTM시술이나 MTF시술을 거치는 사람들도 있는 걸 보면 의료행위가 꼭 사회가 정해놓은 해당 젠더의 외형을 맞추기 위함이라고 볼 수는 없다.

위와 같은 주장을 했으니 트랜스젠더퀴어 커뮤니티에선 젠더 디스포리아와 얼굴에 갖는 불만스러움은 다르다.’고 반박해 올 수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글은 하지마라 부치가 자신의 신체를 내보이지 않는 데에서 출발하여 신체 디스포리아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주길 바란다. 사회에서 얼굴이 가지는 무게와 성징이 가지는 무게가 워낙 다르기 때문에 납득하지 못하는 이도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성기, 혹은 성별과 관련돼있다고 믿는 몇몇 신체부위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길 바란다. 사실 트랜스젠더 담론이 성기환원적인 성별 구분 방식을 부수고 나왔을 때부터, 우리의 성기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게 됐다고 생각한다.

 

글을 닫으며 하나 고백하자면 필자도 몇 달 전까지는 하지마라 부치를 희화화하고 비웃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오히려 트랜스젠더퀴어인 필자와 하는 행동이 비슷해서 그랬던 것 같다. ‘아무리 봐도 디스포리아가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담 젠더퀴어로 정체화하지 왜 부치로 산담?’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공부를 거듭하며 레즈비언 내에 부치, , 전천, 무성향 등 여러 하위 정체성이 포진해있는 것처럼 부치 안에서도 하위 정체성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누군가의 정체성이라면 좀 더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이 독자 분들에게 지금껏 희화화되어왔던 정체성들에 대해 재고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1. 루인, <젠더, 인식, 그리고 젠더폭력: 트랜스(젠더)페미니즘을 모색하기 위한 메모, 네 번째>, 2013 여성학 논집 제30집 1호, P.217-220. [본문으로]
  2. 근육질 레즈비언을 이르는 말. 주로 아프리칸 아메리칸에게 쓰였다. [본문으로]
  3. 보통 다이크 중에서도 근육이나 오토바이 등 ‘남성성’을 강조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 [본문으로]
  4. 근육질이거나 ‘남성복’을 좋아하지만 여전히 ‘여성스러운’ 부분이 있는 부치. [본문으로]
  5. 섹스 시 옷을 벗지 않는 부치. [본문으로]
  6. 하지마라 부치나 가부장 부치와 비슷한 말로 쓰인다. 섹스할 때나 평상시에 ‘어허’라는 말로 상대방을 통제한다는 데에서 온 말. [본문으로]
  7. 가부장적인 부치. [본문으로]
  8. 티 나는 부치의 줄임말. [본문으로]
  9. 주디스 핼버스탬, <여성의 남성성>, 4장 ‘레즈비언의 남성성-스톤 부치도 마음이 울적해진다’, 195페이지-발레리 솔라나스 같은 급진 과격파 페미니스트들조차 날것 그 자체의 섹슈얼리티는 남성에게 양도한 뒤 여성성을 섹슈얼리티보다는 친밀성에 동일시하며, 레즈비언 섹스의 순수성을 페미니즘과 평등주의, 그리고 가부장적 이성애에 고유한 권력 동학에 물들지 않은 상호 욕망이 지닌 기쁨의 완전한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197페이지-화자는 연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볼 때는 우리는 늘 똑같이 느껴야만 해. 그러니까 내가 흥분하면 너도 흥분해야 해.” [본문으로]
  10. <여성의 남성성>, 이매진, 유강은 옮김, 2015년. [본문으로]
  11. <여성의 남성성>, 4장 ‘레즈비언의 남성성-스톤 부치도 마음이 울적해진다’, 200페이지-우리는 비순응적인 젠더를 병리로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스톤 부치가 어떻게 단순하게 성적 기능 장애와 성별 불쾌감의 징후로 읽힐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실제로 스톤 부치는 기능 장애와 불쾌감 둘 다를 의미하지만, 내가 여기서 주장한 것처럼 기능 장애와 불쾌감은 사실상 이 복잡하고 완전히 실현된 성 정체서의 본질적인 부분이 된다. [본문으로]
  12. <여성의 남성성>, 5장 ‘트랜스젠더 부치-부치 FTM 경계 전쟁과 남성성 연속체’, 216페이지-이 글의 취지에서 스톤 부치는 레즈비언과 FTM 사이의 ‘어중간한 영역’을 차지한다. 핀들레이의 정보 제공자 중 한 명은 ‘그/녀’인 자기 자신을 단순히 제이(Jay)라고 부르면서 지금 성전환을 고려중이라고 말한다. 제이는 스톤 부치와 성전환자의 차이를 규정하려 노력한다. “스톤 부치라면 세상에서 느끼는 불편함에 유머 감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FTM이라면 유머 감각을 잃게 되죠. 재미있는 상황이 갑자기 아주 비극적으로 바뀝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