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의 짝사랑
퀴어의 짝사랑
들어가는 글
이 글을 그 친구가 읽을 수도 있고, 자신이 글의 소재가 됐다는 게 불쾌할 수도 있지만, 내 생애 널 가장 사랑했고, 너를 통해 내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느꼈기 때문에, 모든 로맨틱 성향의 퀴어들의 짝사랑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또한 이 글은 내 경험을 바탕으로 쓰는 글이기에 공감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퀴어의 비퀴어(혹은 비퀴어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에 대한 짝사랑은 늘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사실 미안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늘 미안하기만 하다. 퀴어와 비퀴어의 짝사랑이 크게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려고 생각해보니 사랑을 느낀다는 것 외에 모든 게 다르다. 또한 짝사랑의 고통과 외로움이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까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다. 연애는 해 봤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라 외로운 마음으로 시작한 연애였고, 결국 서로 상처만 깊어진 채 끝나고 말았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은 모두 비퀴어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우정이 깊어 같은 곳을 바라보는 듯 다른 곳을 바라보는 사이였다. 그래서 그 애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다시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또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에 빠져서 내 자신을 나락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널 처음 만났을 때 난 너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별로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너의 모습은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친해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또 네가 A에게 하는 행동이 A가 퀴어라면 널 좋아하겠다 싶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는 너는 마음도 없는데 행동이 적극적인 비퀴어 헤테로였다. 나는 그런 비퀴어 헤테로들을 좋아한 적이 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아왔기 때문에 너를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A가 안쓰럽다고 여길 무렵이었다. 우리는 같은 반이면서도 친구의 친구 사이인 존재였다. 그러다가 몇 개월 후 네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난 너에게 빠지지 않으려 했는데 너와 친해지던 순간부터 널 좋아하기 시작했다. 전에는 신경 쓰이지도 않던 네가 마음에 점처럼 박혀서 그 점이 서서히 번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렵 너는 남자 애인이 생겼다.
목소리가 담긴 글
너무나도 깊고 고통스러웠으며 내 생애 가장 뜨거웠던 짝사랑을 마무리 지으며 쓴 글로 내 경험을 털어놓겠다.
너에게,
너란 사람은 정말 멋지고 좋은 사람이다. 너는 나의 존경의 대상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린 서로를 알고 있었지만 못 만날 뻔 했다. 너와 내가 만난 일을 나는 운명적으로 생각한다. 정말 돌고 돌아 너를 만났다. 너는 나에게 친구가 되든 애인이 되든 나와 어떠한 관계가 되어도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난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남자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헷갈리게 했다. 우리가 그저 친구 사이라기엔 우린 서로에게 애틋하고 다정했다. 너는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친구 사이에선 하지 않는 스킨십을 종종 했고, 그때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애써 너는 친구 사이에 이런 행동을 한다고 믿어버렸다. 너는 네 애인 때문에 자주 곤혹을 겪었고,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도 종종 했다. 너는 네 애인을 사랑했는가. 물론 초반에는 사랑했겠지, 그러나 그 후에는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인이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같이 고난을 겪어 왔기 때문에, 애인에 대한 미안함과 과거의 시간과 노력에 대한 아까움으로 스스로가 사랑한다고 속여버린 것은 아닌가. 아니라면, 미안하다. 사실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애인과의 관계를 애써 유지하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나를 사랑한다고 믿고 싶었다. 나는 네가 야속했다. 날 헷갈리게 하는 네가 너무 미웠다. 나는 네가 꼭 나를 정말 좋아하듯이 행동을 해도 다음날 학교에 가면 네가 애인과 행복하게 있는 모습에 자괴감을 느꼈다. 나는 결국 친구였다. 널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난 너에게 내 마음을 고백할 수 없었다. 만약에 혼자만의 착각으로 섣부른 고백을 했다가 좋은 친구 사이마저 어색해지는 게 두려웠다. 그리고 설령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귄다 해도 이별이나 소홀함 혹은 관계 유지의 의무감이 생기는 게 싫었다. 물론, 네가 고백한다면 바로 받아줄 마음은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아주 평생 너를 사랑할 작정이었다. 네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언제든 네 편에 서있는 그런 든든한 사람이 되자며 만족을 하다가도 나는 너무 아파했다. 유독 너에게 기대를 갖게 되는 날들이 있었는데 그런 날이면 너는 어김없이 기대를 져버렸다. 그러한 일들은 그 전에 얼마나 설레는 일이 있었던 간에 네가 나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그런 날들이면 난 혼자 실연의 아픔을 겪어내야 했다. 밥을 잘 먹지 못하고 잠도 잘 못 잤다. 자더라도 새벽에 자꾸 깨 핸드폰을 확인하기 일쑤였다. 어떠한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정작 넌 이런 나를 모르고 다른 이와 사랑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야속하고 이런 내 자신이 싫었다. 누구와 있더라도 널 기다리겠다는 초연의 사랑은 애써 나를 감추는 일이었다. 난 언제나 너도 나를 사랑하길 바랬다.
끝마치는 글
우리는 꽤 시간이 흘러 서로의 진심을 모두 털어 놓았다. 그 때 안 사실인데 너도 나를 좋아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너는 나를 깔끔하게 정리한 듯 나에게 꼭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너를 좋아했다고 다 정리한 듯 말했지만 아직 마음이 남아있다. 우리는 서로 좋아했지만 너는 나에게 스퀴쉬를 느낀 거고 나는 너에게 크러쉬를 느꼈던 게 아닐까. 스퀴쉬와 크러쉬는 그 경계가 모호하다. 무로맨틱에 대한 개념과 관계없이 나는 쉽게 말해 스퀴쉬를 깊은 우정이라고 생각하고 크러쉬를 연애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두 감정 모두 상대방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질투도 느끼고, 스킨십에 대한 욕심도 있다. 우리는 쉽게 위와 같은 감정을 느낄 때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하나?’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스퀴쉬에서 크러쉬로 감정이 변할 수도 있고(내 가치관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부분이 크기에 나는 스퀴쉬의 진전된 형태가 크러쉬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너무 개인적인 해석이므로 변한다고 썼다.) 혹은 처음부터 크러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크러쉬는 추가적으로 내가 상대와 애인 관계가 되고 싶다, 애인 관계의 스킨십을 하고 싶다, 혹은 결혼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결혼에 대한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애인 관계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 규정이 모호해서 나는 아직도 스퀴쉬와 크러쉬에 대한 구분이 어렵다.) 나는 그래서 아직도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깊은 우정을 나누는 우리 관계를 퀴어 플라토닉이라고 정의 내렸다. 내 인간관계 내에도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들이 몇 있지만 널 그와 같은 친구라고 하기엔 우리 사이가 가볍게 여겨지는 것 같아서 고민을 해봤다. 우리는 확실히 너무 감정적 거리가 가까웠고 지금도 가깝다. 일반적 우정 이상의 분위기가 자주 감돌았다. 퀴어 플라토닉은 로맨틱 관계와 유사한 것으로 간주되며 로맨틱 혹은 성적 지향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자주 한 침대에 누워 있던 것, 종종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던 것, 네가 우리가 지금 까지 해왔던 스킨십 그 이상의 스킨십도 원한 적 있다는 것, 나 또한 그랬다는 것은 우리가 퀴어 플라토닉 관계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성애의 관계는 쉽게 구별이 가능하지만, 퀴어와 비퀴어의 관계는 사랑인지 아닌지 그 경계가 너무 모호하다. 오늘도 날 헷갈리게 하는 친구 때문에 힘들어 할 퀴어들에게 이 글이 도움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