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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 이름 짓기, 그리고 다시 지우기.

"Love Wins!" "사랑이 이긴다!"


퀴어문화축제부터 성소수자 이슈 관련 집회 현장까지, 상당히 자주 들을 수 있는 구호들이다. 실제로 서울퀴어문화축제 슬로건에 '사랑'이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등장한 적도 있다.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랑'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비규범적 로맨스-섹슈얼리티의 정상성일 것이다. 말하자면, '이성애'가 아닌 '사랑'도 '사랑'이기 때문에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그런 말들이라고 생각된다. 즉, '사랑'이라는 말이 가지는 가치와 정상성, 호소력에 크게 의존한 슬로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슬로건을 전면으로 내세울 때, 배제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비규범적 로맨스-섹슈얼리티만을 포함할 수 있는 슬로건은 젠더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뿐만아니라, 비규범적 로맨스-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사람들도 이 슬로건에 배제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이 쓰이는 방식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사실 서로 구분되어서 논의되어야 할 개념들을 한꺼번에 집어 삼키고 있다. 성애-연정과 관한 사랑의 사전적 정의는 물론 어떤 욕망이나 감정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랑이라는 개념은 이곳 저곳에 들러붙어 있다. 언약관계, 결혼, 섹스 등의 개념은 항상 '사랑'이라는 것과 필연적으로 유관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게다가 연정적 끌림과 성애적 끌림은 잘 구분되지 않고 쓰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연정과 성애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조차 사실 알려져 있지 않은 현실인 것 같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지는 강력한 끌림 역시 사랑으로 해석되기 십상이다. 여러가지를 삼키고 뭉뚱 그려진 덩어리와도 같은 것이 사실 '사랑'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는 어떤 거대한 개념은 일종의 억압으로서 작동하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 '사랑'이라는 개념은 유연정-유성애 중심적이며, 사실 연정과 성애의 구분을 포함하지도 않으며 어떤 유관한 실천 혹은 행위들을 늘 동반하는 것을 전제한다. 이러한 '사랑'은 각자의 삶의 서사에서 늘 존재해야 되는 것으로 여겨지며 유의미한 주제로서 등장하기를 요구받는다. 이때, 개개인의 다양한 경험들은 뭉뚱그려진 단일한 해석의 틀로서의 '사랑'에 의해 해석된다. 이 지점에서 경험의 특유함은 사라지고, 주변화 된다.
심지어 ‘사랑’의 부재는 기이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모솔'이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모솔'이라는 말은 모태솔로라는 말의 준말로, 태어날 때부터 '솔로'가 아니었던 적이 없는 사람을 지칭하는 일종의 조롱하는 말이다. 이 말의 함의는 '연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다던가, 그 자체가 결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솔'로 지칭되는 사람들이 어떤 연정적 끌림을 당연히 느끼지만 연애를 못하는 사람들로 재현된다는 것이다. 혹은 '연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을 '핑계'로 자신의 연애 못함을 정당화하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즉, 모든 사람들이 연정을 느끼는, 로맨틱한 끌림을 느끼고 사는 것이 당연하고 연애를 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비단, 연정과 관한 이러한 사례 외에도 성애와 관련된, 섹스와 관련된 사례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상이 정상성 규범으로서의 '사랑'이라는 개념틀로 개개인의 삶을 해석하려는 시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실로 사랑이 강요되며, 과잉된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잡아 끌고 있는 유연정-유성애 중심적 세계, 사실 그 두 구분 되어야하는 개념과 경험들 조차 구분하지 않는 그 사랑의 세계에서 관계성과 관련한 다양한 욕망들에, 혹은 하나의 틀로 생각될 수 없는 그 끌림들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일종의 비규범적 실천이다. 규범적 개념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사랑'이거나 혹은 '우정'이거나 둘 중 한 가지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 우정이 허용되고 사랑이 허용되는지에 대한 문제도 있지만, 여기서 논할 것은 '사랑'으로 해석되는 것들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연정과 성애에 대해 규범적으로 존재하는 이름은 사실 '사랑'이라는 것 외에는 없다. 따라서 연정과 성애를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이와 관련한 다양한 경험과 욕망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일종의 규범 밖 실천이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름을 붙인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것을 부를 수 있으며, 이제 그것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이름은 어떤 형식의 사건 혹은 존재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는 작업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름 짓기란 일종의 추상화 작업이기도 한 셈이다. 주변화된 것들에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결국 그것의 존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동시에 중심에 있던 것들과 동등한 위치에 자리 잡게함을 의미한다. 주변은 중심을 통해서만 정의되어 왔지만, 중심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통해 주변화된 것들을 복귀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에이스-에이로 담론의 의미는 사랑에 의해 뭉뚱그려진 개념들의 날을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그 담론 내부에서, 주변화되었던 욕망과 관계의 경험들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이름, 유로맨틱/유성애 중심적인 그 개념에 의해 억압받았던 존재들이 귀환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해석적 틀을 벗어나는 비규범적 실천과 경험들, 그리고 욕망들이 실재하는 것이다. 에이-엄브렐라 담론 하에서, 이러한 욕망에 이름을 붙이고 개념의 범주를 나누는 실천들은 결국 유성애/유로맨틱 중심적 세계에서 가라앉아 있고, 주변화 되어있던 그 ‘무엇들’에 삶을 불어넣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이름 붙이는 행위가 결코 그 이름들로서 해석되는 경험들의 소수성이나 비정상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에이스-에이로 담론은 유성애-유연정을 모두 포함한 경험에도 또 다른 이름을 지어주는 과정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것을 정상 혹은 기준으로서 간주하고 그 밖에 것들을 그것을 통해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규범적 실천 역시 담론 내부의 기준과 체계에 의해 재구성한다. 이러한 이름 짓기의 과정들로부터, 여기서부터 ‘사랑’ 중심의 서사에서 해석될 수 없고 비가시화 된 것들의 귀환은 시작된다. 경험의 수만큼, 이름의 수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주어진 수많은 이름 중에 나에게 맞는 이름이 없을 경우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몇 개월 전, 젠더 정체성에 대해서 재정체화를 겪었는데 이것을 계기로 나의 섹슈얼-로맨틱 지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기회가 생겼다. 기존의 정체성은 나의 젠더 정체성과 어떤 유관한 형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젠더가 없다고 정체화한 이상 나름대로의 재정립이 필요했던 것이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남성애자'라는 말을 썼다. 기존의 성적 지향에서 내 젠더에 관한 내용만 지우면 되겠거니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에 더불어 에이스-에이로 엄브렐라에 관한 지식을 접하게 되어 정체화는 '남성애자'라는 말로만 끝나지는 않았다. 과연 내가 알로 로맨틱-섹슈얼일까하는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나의 경험에 맞는 정제된 언어를 찾아갔다. 그러나 결국 이에 실패하고 말핬다. 나의 경험과 관계들, 그리고 삶의 맥락을 이미 존재하는 단어로 정의하려고 하면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언어로 포착되지 않고 계속 의미의 가장자리를 남겼다. 나에게 남겨진 선택지란 기존의 이름을 가져다 쓰는 대신 다소 살을 붙여서 얘기하는 것, 새로운 이름을 짓는 것, 그리고 이름 짓기 자체를 그만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름을 지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기로 하였다.

계속해서 자신에게 맞는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 필요하다면 새로 지어서까지 자신의 삶을 설명할 이름이 필요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아마도 실존을 위한 모종의 노력일 것이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 그것은 앞서 말했듯 언어 저편에 가라앉아있던 경험과 삶의 궤적을 언어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어쩌면 오롯이 "나"로 살려는 욕망의 표현일 것이다. 언어를 통해 부를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거기-있음'의 강력한 하나의 표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매우 지난하고 피로한 것인 경우도 있다. 계속해서 자신을 설명하고 이름을 찾아가야한다는 것은 일종의 짐이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일종의 실존적 피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실존적 피로가, 퀴어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의 의무가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모든 경험과 욕망에 대해서 이름이 필요한 것일까.

욕망에 이름을 짓는다고 해서 그 이름이 우리 자신이 되진 않는다. 이름을 찾는다는 것은 잃어버린 '나'를 찾는 것이 아니다. 삶을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한 언어를 찾는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그 언어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삶과 욕망들이 존재한다. 이름 지을 수 없는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름의 수가 부족한 것을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계속해서 명명할 수 없는 의미의 가장자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의미의 가장자리라기보다, 오히려 우리의 시야의 가장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욕망들이 있다. 과연 우리의 욕망에 이름은 필요한가. 언어의 가장자리의 남는다고 해서 그 욕망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마치 원래부터 없던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분명, 이름 지음을 통한 가시화는 가능하다. '사랑'이라는 큰 개념에 집어삼켜지고, 이것으로 설명되지 않아 추방된 경험들의 복귀는 그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욕망을 설명하는 틀로서 이름은 작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n개의 이름 지음을 통한 의미의 경계들, 경험의 경계들은 어쩌면 n개의 경험들과 n개의 이름들만을 남길지도 모른다. 이 순간 모든 것은 범주화된다기 보다 하나의 특유한 것으로 남게 된다. 실존을 위해 이름이 필요하였지만, 무수한 욕망과 삶의 경험들이 그 이름의 경계를 극복하여 하나하나의 무언가로 존중받는 것을 위하여, 나는 욕망에 이름짓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한다.

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