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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팀/쟁뉴

[폭력] 누구도 저지른적 없는 폭력



1. 서론: 협의의 폭력, 광의의 폭력


폭력: 사람이 다른 사람을 난폭하게 때릴 때 쓰는, 주먹이나 발이나 몽둥이 따위의 수단. 넓은 뜻으로, 무기로 억누르는 힘을 나타내기도 함 [국어사전]

폭력은 보통 물리적인 강제력을 의미한다. 혹자는 물리적/정신적 손상에 초점을 두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폭력의 의미는 물리력이나 손상의 범위를 떠나있다. 대표적 사례로 학교폭력이 있다.


학교폭력(學敎暴力)이란 학교 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 제 2조의 1에 따르면 학교 내외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발생한 상해, 폭행, 감금, 협박, 약취 · 유인, 명예 훼손 · 모욕, 공갈, 강요 · 강제적인 심부름 및 성폭력, 따돌림, 사이버 따돌림, 등이 있다.


여기서의 ‘강제적인 심부름’ 등에서 볼 수 있듯, 물리력이나 손상의 범위를 넘어, 정신적 피해나 위협 그 자체도 폭력의 일종으로 이야기된다. 이런 맥락에서, 데이트폭력, 시선폭력, 가스라이팅, 혐오표현같은 행위들도 폭력의 일종이라는 사실이 환기되고 있다. ‘일상적 행위’인 줄 알았던 것들이 폭력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고, 누구도 폭력이라 생각한 적 없는 일들이 폭력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폭력의 외연은 점점 넓어져가고, 추상적 영역도 포괄하고 있다. 이렇게 바라보면,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 왜일까? 어떻게 이렇게 폭력이 만연하게 되었을까? 폭력의 일상화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2.1 폭력 권하는 사회

 세상에 폭력이 일상적이라는 사실은 언어생활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체벌같은 폭력 외에도, 미디어에서는 총과 칼이 난무한다. 많은 이야기들은 폭력 없이는 진행되지 않으며, 심지어 폭력과 별 관련이 없는 내용의 노래들의 경우에도 안무, 뮤직비디오 등에 총은 단골으로 등장한다. 

 우리나라야 총기가 불법이니 정말로 ‘먼 나라 이야기’겠지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총기 사고, 범죄, 실제로 내전 등이 일어나는 국가에서 총기로 인한 피해와 두려움 등을 생각해 봤을 때, 총, 나아가 폭력을 미디어에서 소비하는 방식은 한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터넷 사용자의 대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어휘들에는 키보드배틀, 키보드 워리어, 지원사격 등의 은유가 등장한다. 또한 이 ‘배틀’은 어째서인지 전쟁의 문법을 그대로 가져와서, 자리를 피하는 행위를 ‘비겁’하다는 등의, 역시 전쟁의 맥락에서 특정 가치의 부재에 따른 비난을 통해 서술한다. 인권 운동에서도 우리는 전쟁을 해나간다는 비유를 흔하게 사용하며, 어떤 페미니스트들을 “페미 전사”라는 이름으로 추앙하곤 한다. 왜 하필 전사일까? 페미 요리사, 페미 선생님 등은 안되는가? 

 미디어 뿐만 아니라, 인권 운동 영역에서조차 직/간접적으로 폭력은 만연하다. 폭력은 비유로서, 은유로서, 혹은 직접적으로, 놀라울 정도로 무분별하게 유희거리로 소비되고 있다. 지적하면 폭력과 관련된 것을 알겠지만, 이미 둔감해진 채 소비하고 그것이 폭력임을 신경쓰지 않는 것이다. 

 


2.2. 이런 것도 폭력인줄 몰랐다. 폭력인 줄도 몰랐던 폭력

  이번엔 조금 더 간접적인 폭력을 이야기해 보도록 한다. 이들은 폭력이라고 이름이 붙기 전까진 폭력이라고 인지하기도 힘들었던, 하지만 일상에 만연했던 것들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시선폭력이 있다. (참고기사: 

요즘 젊은 여성 사이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신조어가 있으니, 이름하여 ‘시선 폭력’이다. 원치 않는 타인의 시선을 받는 것은 폭력을 당하는 것처럼 불쾌하다는 뜻이다. 이 표현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다소 섬뜩한 ‘시선 강간’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남성의 음흉한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 강간에 준하는 정신적 고통을 느낀다는 의미란다. 논란도 뜨겁다. 지난 2일 한 30대 여성이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는 이유로 70대 남성을 발로 차고 가방으로 때린 사건을 두고 일부 여성이 “할아버지의 시선 강간이 문제”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다.

지난달엔 한 사립대 게시판에 여학생이 같은 대학 남학생을 시선 폭력으로 고발하며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학생은 “쓱 쳐다보는 것과 민망할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보는 건 다르다”며 시선 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남학생들은 “쳐다보는 것도 죄냐”며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만약 이 대학이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였다면? 해당 남학생은 성희롱 혐의로 처벌 대상이 된다. 지난해 “쳐다보는 것(staring)도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학칙에 적시했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도 논란이 일었지만 “쳐다보는 것”과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은 동급으로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시선의 불편함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이도 있다. 미국의 사진작가 헤일리 모리스 카피에로 얘기다. 거식증에 걸렸다가 갑상샘 기능 저하로 비만이 된 그는 길거리에서 자기를 한심한 듯 쳐다보는 타인들을 촬영해 시선 폭력을 고발했다. 반면 우리 사회에서 시선 폭력 문제는 또다시 남녀 간의 대결구도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이 문제는 그러나 비단 남녀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공공장소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받고 마음이 불편했던 경험은 대부분 있을 터. 시선 강간 논란을 예민한 여성의 소음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가 시선의 자유에만 관대하고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에는 둔감한 게 아닌지 돌아볼 계기로 삼아 봄 직하다.

타인의 시선이 불편한 원인은 뭘까. 불문학자 박정자씨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 이론을 분석한 저서 『시선은 권력이다』에서 “바라보임을 당할 때 생겨나는 것은 수치심”이라며 이렇게 썼다. “우리가 타자의 시선 앞에서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끼는 것은 그의 의식 앞에서 내가 대상, 즉 사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회를 위해 “쳐다보는 게 무슨 죄냐”는 질문은 이제, 거둘 때가 됐다.

[출처: 중앙일보] [분수대] 시선 폭력, 당신도 가해자일 수 있다

 시선폭력은 물리력의 행사와는 거리가 멀다. 시선폭력은 피해자가 당했는지도 알 수 없게 행해지기까지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폭력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데이트폭력, 가스라이팅 등도 이름을 붙이는 순간에조차도 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곤 하는 폭력의 일종이다. 데이트폭력을 현재진행형으로 당하고 있을 때에, 데이트폭력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행위가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는 무척 어렵다. 데이트 폭력의 개념을 알고있어도 어려운 일이다. 만연한 폭력은 이렇게, 존재 자체를 깨닫기 어렵고, 적극적으로 찾아내 개념화하고, 이름을 붙여야만 가시화되기도 한다.


2.3. 거울의 조각 – 미러링의 폐해

 폭력의 방향성은 명확할까? 폭력인지 아닌지 가장 헷갈리는 행위중 하나가 저항이다. 가장 대표적인 저항 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 중에 미러링이 있다. 주체와 객체를 반전시켜 기존 구도의 불합리를 폭로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항상 옳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에, 미러링은 많은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첫째로, 미러링은 주체와 객체 이분법을 공고하게 만든다. 결국 그 경계의 존재들을 지워버리고, 대립 구도 바깥의 더 큰 구도는 건드리지 못한다. 동성애와 이성애를 반전하면 양성애, 범성애, 무성애는 지워지고, 완전히 같은 억압을 그대로 받는다. “나, 너가 동성으로 느껴져” 라거나 “동성간에는 친구 없다”, “이성애가 아니라, 좋아했는데 성별이 우연히 달랐을 뿐”, “어머 너 이성애하니? 편견은 없는데~”같은 말들이 무엇을 배제하고 있는가? 남성과 여성의 ‘반전’중, 남성이 여성을 성기로 환원하는 행위를 놔둔채 미러링하여 만들어진 “보지대장부”나 자지와 관련된 수많은 미러링들은 성기환원이라는 근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인터섹스와 트랜스젠더등에 대한 배제로 이어진다. ‘반전’ 같은 행위는 결국 세상에 반전 대상인 둘만 존재한다는 인식을 강화시키고, 주변부를 모두 묻어버리기 십상이다. 결국 어떤 혐오들은 그대로 놔둔 채, 일종의 내리갈굼이 일어난다.

 둘째, 미러링은 불합리를 폭로하는 바로 그 상황에서만 유의미하다. ‘니애미’라는 말에 대항하기 위한 ‘느개비’같은 어휘는 ‘니애미’의 불합리를 지적하는 메타적 상황에서만 유의미하다. 이것이 개인적 공격으로 사용되는 것은 안된다. 역시나, 결국 배제당하기 쉬운 것은 주변부의 사람들, 정상가정 형태를 지니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서양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미러링’한 ‘갓양남’의 경우에도, 결국 인종차별적 구도는 그대로 가져온다. 흑인이 소환되는 것은 생식기 크기나 피지컬이고, 백인이 소환되는 것은 태도 관련이다. 뿐만 아니라 황인종은 여전히 빠져있고, 실존하는 서양 남성들의 여성을 향한 폭력은 지워버린다. 서양여성을 소환하는 불합리를 지적하는 이상으로 나아갈 경우, 기존 시스템이 가진 문제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미러링은 너네가 했으니까 나도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아무 폭력적인 말이나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미러링은 전략의 일종이고, 한계가 명확하다. 유효한 지점이 분명 있겠지만, 허점은 확고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한다. 미러링은 철저하게 “이렇게 말하면 봐, 이상하지?”라는 말을 뒤에 붙일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


3. 결론 : 누구도 저지른 적 없는 폭력


 이렇게 폭력인줄 몰랐던 것들에 폭력이라는 라벨을 붙이고 보니, 우리 모두는 폭력을 저지르고 있었고, 세상은 폭력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 놀라운 것은 많은 폭력들이 폭력이라고 생각조차 못한 채 휘둘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폭력에 저항한다는 이름 아래에 다른 폭력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폭력의 일상화에 자신도 모르게 기여하고 있다. 

 “세상의 80%는 양성애자래”라는 선언과, “나 우울증올것같아” 같은 정신질환을 가벼이 만드는 선언 등은 각종 소수자를 지운다. 소수자의 언어를 빼앗아 그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행위의 연장에 폭력이 만연하고, 폭력과 폭력 아닌 것을 구분하기 힘든 지금의 상황이 있다. 폭력인 것을 알면서도 행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폭력인줄도 모르고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폭력과 구분하기 어려운 행위에는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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